♡ 01
여정이 복수를 끝냄과 동시에 동은과의 연까지 비로소 끝낸 뒤
세명시에 남았을 무렵, 하다가 술에 취해 여정에게 입을 맞췄다면?
하다는 그저 민망해서 없었던 일인 척 굴었어요.
그러나 여정은 알고 있죠.
하다가 술에 취해 필름 끊기는 일 따윈 거의 없는 일이며
하다는 분명 어제의 일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여정은요,
꼬인 끈과 같았던 복수와 동은과의 연이 모두 끝났고,
그래서 하다에게 가졌던 미완의 감정도
이제야 정말로 마주할 수 있겠다 생각했을 거예요.
또 그러려던 참이었으니 결착을 위해 하다에게 물었겠죠.
"하다야, 너한테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
"오빠? 나한테 둘도 없는 평생 친구 같은 거지. 절대 잃을 수 없는."
"아, 그래? 우리 하다는 친구끼리 뽀뽀도 하고 그러는구나.
오빤 처음 알았네."
곤란해하는 하다의 얼굴을 보고, 여정은 말을 이어갔어요.
"아휴, 큰일이다. 오빠는 우리 하다 그렇게 안 키웠는데 말이야, 응?"
그리고 다시 돌아갔죠.
'가족 같은, 친오빠 같은' 하다가 원하는 평생 친구의 자리로.
아직은 때가 아닌지도 모르죠. 여정은 숨죽인 채로 기다려요.
♡ 02
여정은 하다의 첫사랑을 받아주지도 않아 놓고,
하다가 자신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참 유난히도 차가운 표정에 무뚝뚝한 말투를 썼겠죠.
"하다야, 오빤 너 우는 거 보려고 너 포기한 거 아니야."
"왜 자꾸 사랑은 그놈이랑 하고 우는 건 오빠 앞에서 해.
넌 오빠가 그렇게 편해?"
♡ 03
"가지기를 원한다면 언제든 가질 수 있으면서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는 사람"
여정의 모든 지인들은 여정을 이렇게 평가할 거예요.
물론 목적어는 표하다이고요. 결국 그는 겁쟁이인 거죠.
이 날은 여정이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한 날이었어요.
피로연에서 술을 제법 많이 마시고
여정의 '하다에 대한 사정을 아는' 친구들에게
이런 걱정 섞인 조언을 들었을 거예요.
"여정아. 너 너무 그렇게 여유잡지 마라.
그러다 정말로 하다가
그 학생이랑 결혼이라도 한다고 하면 너 어쩌려고 그래.
네가 행동만 제대로 취한다면 하다는 분명 너와 함께할 거야.
우리가 봐와서 알아."
여정은 그날 밤, 취기에 진 체하며 하다에게 물었죠.
"하다야, 오빠가 진짜 네 가족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넌 뭐라고 할래?"
"오빠는 이미 내 가족인데?"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하다에 여정은 할 말을 잃었죠.
그러나 어쩔 수 없죠. 전부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이니까요.
여정은 온전히 갖지 않음으로써 잃지 않으려다가
이제는 아주 잃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 04
한국대 앞에서 은혁과 붙어있는 하다를 본 여정.
스승의 날을 맞이해 다 같이 은사님 뵈러 한국대에 들른 여정과 동기들.
날 선 표정 잘 보이지 않는 여정의 얼굴이
일순 너무 차가워져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끝에는 표하다가 있었겠죠.
동기들은 헛웃음부터 나왔을 거예요.
'이래도 그저, 여동생으로 좋아하는 거라 우기겠다는 건지.'
그런데, 그들도 느꼈어요.
하다에게 남자 친구야 늘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죠.
하다가 저 학생을 보는 눈이 여정을 볼 때와 꽤나 근사했거든요.
"너 긴장 좀 해야겠다, 여정아."
"하하. 뭐 하다한테 남자친구만 생기면 그런 말을 하고 그래.
우리 하다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아니, 이번에는 좀......."
"좀, 뭐."
"아니다. 내 기우겠지."
여정은 동기들에게서 벗어나 하다 뒤로 바로 다가갔겠죠.
그리고 은혁이 보란 듯이 하다를 뒤에서 끌어안고 말했을 거예요.
"아이고, 우리 공주님은 신성한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시고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건지 오빠한테 설명을 해보시겠어요?" 하고.
질투를 숨기지도 않았는데
하다는 마치 여정이 걸어놓은 풀리지 않는 흑마법에 걸린 것처럼
여정의 마음을 홀로 눈치채지 못할 테고요.
♡ 05
여정은 하다가 자신의 앞에서 웃어줄 때 참 좋았겠죠.
그런데 하다에게 연인이 생기고 그의 팔짱을 끼고 다니며
그의 앞에서 웃어주는 것을 보는 건 끔찍이도 싫었겠죠.
그게 오빠로서의 보호 본능이라고 착각하면서요.
자꾸만 넥타이가 목을 죄는 느낌에 집에 돌아와서야
자신이 대단한 착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구나 깨달았을 거예요.
"그 아이를 아주 취하지 않고도 괜찮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 하다의 연애는 늘 얼마 가지 못했고 2,3개월 가면
다행일 정도였는데 은혁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겠죠.
이번엔 정말로, 아주, 영영 잃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사랑을 하고 있는 남자의 직감 같은 것이 밀려왔겠죠.
♡ 06
"표이준 교수님 딸 있잖냐, 하다."
"우리 하다가 왜요?"
"오늘 병원에 표이준 교수님이랑 같이 온 것 같더라고.
옆에 안경 낀 남자애가 하나 붙어 있던데, 남자친구 생겼더라?"
"남자친구야 전에도 늘 있었죠."
"이번엔 좀 다른 것 같던데? 눈에 쓰여있더라, 야.
좋아 죽겠어요, 하고. 근데 그게 참 신기하더란 말이야."
"뭐가요?"
"전엔 널 그렇게 봤었단 말이지. 내가 분명히 기억하기로는."
"선배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요?"
"너 실연당했냐?"
"당한 것 같네요. 저는 제가 한 줄 알았는데, 차암."
"야, 그러지 말고. 교수님 백으로, 어떻게. 어? 그 골키퍼 좀 치워 봐."
"그러기엔 제가 너무 아껴요, 하다를."
표하다와 주여정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는 여정의 선배와
여정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모두 듣고 있다가
의문에 가득 차 한 마디 하는 간호사 선생님
"....... 아니, 하다 양이 무슨 결혼을 했어요,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기를 했어요, 뭘 했어요.
주여정 선생님 안 어울리게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세요?"
♡ 07
은혁이 하다와 헤어질 때 하는 말.
“전요, 누나.
누나가 햇살처럼 눈부실 때가 가장 사랑스러워요.
그게 가장 누나답다고요.
제 앞에서 누나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처럼 밝게 빛이 나길 바랐어요.
그런데요, 누나. 그거 아세요?
누난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은데.
누난 그 사람 앞에서 가장 빛이 나요.
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한테 사랑받을 때.
아. 가족이라서 그렇구나.
처음엔 내가 언젠가 그 자리 뺏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어요.
희망이라는 걸 가졌죠.
전 제가 꽤나 객관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제가 사랑에 눈이 멀었던 거죠.
누나는요, 늘 그 사람 앞에서 가장 빛날 거예요.
누나가 행복하길 바라니 사랑해서 놓아준다는
그런 유치한 말이 아니에요. 그저 제가, 제 알량한 자존심이.
딱 여기까지네요.
사랑했어요, 누나.”
♡ 08
📞
"어, 하다야. 오빠 이제 막 진료 끝나고 퇴근…….
너 술 마셨어? 지금 어디야.
옆사람 바꿔. 주소 부르라고 하게.
표하다, 너 빨리 말 들어.
비 와서 안 돼 걸어오긴 뭘 걸어와.
고집부리지 말고. 옆에 바꿔, 빨리."
이은혁과 헤어진 날의 표하다는요, 잘 취하지도 않는 애가
친한 친구들과 술 거나하게 마신 채로 여정에게 전화했겠죠.
남들이 들었을 때는 취기 있는 것 하나도 티가 나지 않을 텐데,
주여정은 표하다의 손톱만큼의 변화도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
전화받자마자 알아챘을 거예요.
절대로 다정하게 말하는 주여정은
심지어는 밖에서 아예 모르는 남한테 화가 났을 때에도
좀처럼 차가운 말투를 쓰지 않는데
그 예외가 표하다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뿐이겠죠.
마치 모두에게 친절한 표하다가
주여정에게만 툴툴거림이 과한 것처럼요.
♡ 09
은혁과 헤어지고 울면서 비 오는 날 여정의 집 앞에서
여정을 기다리고 있던 하다는, 여정을 보자마자
그의 가슴을 솜주먹으로 때리며
“오빠 때문에 은혁이랑 헤어졌잖아 어떻게 할 거야?”
라고 소리쳤겠죠.
그리고 여정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요.
여정은 오래 참아왔고, 많이 기다려왔고,
그리고 고요하게 폭발해 왔으니까요.
♡ 10
"언제부터......."
"뭐 때문에 나를 더 사랑한다고 깨달았다는 거야?"
(quote from house m.d.)
여정이 하다에게 아주 긴 고민 끝에 사랑을 고백한 날에,
하다의 첫마디는 이랬을 거예요. 하다는 의아했을 테니까요.
"오빤 나를 늘 사랑했다며. 갑자기?
무슨 계기로 날 친동생처럼이 아니라 연인으로서 사랑하게 된 거야?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오빠가 먼저 나한테 오빠를 향한 내 애정은 그냥 가족의 그것과 같다며."
"오빠가 감당 못 할 말을 그렇게 쉽게 하지 말았어야지, 그럼."
하다는 여정이 미웠겠죠. 아주 많이요.
결국에 견디지 못하고 사랑을 고백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여기까지 돌아온 시간이 여정은 아깝지 않은 것인지.
그러니 이 둘이 이어져도, 한동안 여정은 후회하며 하다를 설득하고
하다는 그런 여정을 의심하고 무심하게 굴었겠죠.
그러는 동안에 여정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잠자코 고통받았을 테고요.
그렇지만 여정은요, 하다가 날 때부터 그녀를 사랑했으며
그저 옆에서 보기만 하는 것을 30년 가까이해 왔으니
자신의 죄로 자신을 무심하게 대하는 하다가 다시 마음을 돌리는 것
그까짓 것 100년도 못 기다리겠나, 생각했을 거예요.
♡ 11 "여정에게"
하다가 보내는 편지
더보기
오빠는 정말 바보지.
사춘기 시절 중학생 때 한창 남자애들끼리 몰려다닐 나이에도
진짜 친동생도 아닌 엄연히 그저 남일뿐인날 놀아주느라 바빠
친구들에게 얼레리꼴레리 놀림받아도 내 손을 꼭 잡고
집에 돌아가 같이 꿈빛파티시엘이나 봐줬으면서
어떻게 끝까지 나에 대한 사랑을 가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양가 모임 할 때마다 얘네 둘 결혼시켜야 한다는 말 으레 나왔는데
"아휴, 하다야 제가 당연히 데리고 살아야지 어쩌겠어요."하고
너스레 떨던 그 말은 둘도 없는 진심이었으면서.
말로 내뱉으며 그게 사랑인 줄 정말로 몰랐던 건지 외면했던 건지.
오빠가 고등학교 올라가서 여자친구 한 둘 생기기 시작하면서
나는 오빠를 향한 첫사랑 실연 당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우는 내 얼굴의 눈물 자국 지워주면서
"하다야, 오빠는 하다의 연인이 되는 것보단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아.
그럼 우리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수 있잖아, 그렇지?"라는
자기 암시 같은 말이나 하고.
그런 오빠의 말 곱씹고 곱씹다 보니 설득되어서
'아, 이게 진짜 사랑이 아니었구나. 내가 했던 사랑은 우정이고
또 가족애 같은 것이었구나.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결론 지은 내가 단념해 버리고
나 역시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남자친구 하나둘 사귀는 모습을 보며
오빠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어?
"어허,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무슨 손을 잡기를 잡아."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있는 다른 남자의 손을 떼어놓으며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정말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지.
아니면 그저 당연히 마지막은 너에게로 돌아갈 거라 자신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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