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사랑의 열병
여정이 초등학생, 하다가 유치원생이던 시절.
하다가 독감으로 크게 앓았던 때가 있었어요.
여느 때처럼 학교 끝나고 하다를 놀아주러 가던 여정.
원래는 늘 돌보미 이모님이 계셨는데, 오늘따라
하다의 아버지인 표이준 씨가 문을 열어 여정을 반겼겠죠
"여정이 왔니? 아이고. 이거 미리 말을 못 해줘서 어쩌나.
헛걸음하게 했네. 삼촌이 너무 미안해. 하다가 독감을 앓아서
오늘은 하다가 여정이랑 못 놀 것 같아. 쿠키라도 먹고 갈래?"
"삼촌. 하다가 많이 아파요?"
"금방 괜찮아질 거야. 너무 걱정 않아도 된단다."
자기랑 병원 놀이 곧잘 하던 하다, 이번에도 아프지 않으면서
괜히 꾀병 부리는 것은 아닌지. 여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당 뒤로 돌아가 하다의 방 창문을 슬쩍 내다보았어요.
그런데 창문 너머 하다는 정말로 많이 아파 보였죠.
얼굴은 발갛고, 숨도 겨우 쉬는 것 같고.
여정은 초등학교 6년 중 5년 동안 개근상을 탔는데,
그해 딱 한 번 개근상을 타지 못했어요.
아픈 하다를 보고 온 다음 날 여정도 앓아누워버렸거든요.
"여정이는 하다네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는데 왜 아프대요?"
"상사병인 거 아니에요?"
성학 씨는 허허거리며 웃었어요. 상임 씨는 그래도 아들이
아프다는데 웃기만 하는 남편을 조금 흘겨보았죠.
"애 좀 살펴봐야겠어요. 열 떨어졌는지도 좀 보고."
체온계 들고 방에 들어서려는 상임 씨를 성학 씨가 붙잡았어요.
"내버려 둬요, 여보. 여정이 쟤 지금 열도 안 나."
"근데 학교도 빠지게 그냥 둬요? 버릇 나빠져."
"남자는 다 그럴 때가 있는 거예요."
주성학과 박상임 씨는요, 여정이 하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저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을 거예요.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하다는 내가 챙겨줘야 하는 동생이잖아."
라는 여정의 말에 상임 씨는 그래서 조금 신경이 쓰였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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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여담으로,
어릴 적 여정은 하다가 아플 때마다 같이 앓아누워서
상임 씨는 여정이 하다 20살 성인 되자마자
결혼하겠다고 할까 봐 솔직히 좀 걱정했었대요.
상임 씨라고 알았을까요.
아들이 서른 넘을 때까지 하다를 짝사랑만 할 줄은.
♡ 02
주여정의 어머니, 박상임 씨는
여정이 하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언제 명확히 알게 되었냐면요.
주여정 열두 살 표하다 여덟 살,
"오빠오빠, 나 오빠랑만 놀 거야." 하던 하다가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고 또래 친구들도 생기고 나니
"이제 오빠랑 안 놀아. 오빠 싫어." 하는데.
박상임 씨는 여정의 표정을 보았어요.
온 세상을 잃은 표정이었죠.
여정은 하다와 완전히 반대였거든요.
학교 들어가 한참 또래 친구들과 팽이 놀이하고 총 놀이 하기를
좋아할 나이였는데 단 한 번도 하다와 놀아주는 것을
귀찮아해 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하다가 우선이었으니까요.
여정은 자기가 오빠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았죠.
♡ 03
"하다야, 하다는 나중에 커서 누구랑 결혼할 거야?"
"우리 아빠."
"아이, 이미 결혼하셨잖아. 하다 엄마랑. 안 돼요."
"으음. 그럼 옆집에 잘생긴 허스키."
"걔는 개라서 안 돼요."
"그럼....... 유치원에 민수."
"민수는 오빠가 반대."
"으으음......."
"근데 하다야, 오빠 이름은 언제 나와?"
♡ 04
고등학생의 여정은요, 졸업할 때 여자 동급생들, 그리고 후배들이
교복 단추와 이름표 달라고 여럿 왔는데도
웃으며 정중히 거절하고 단추 전부 빠짐없이 사수했어요.
하다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 말이에요.
하다는 달라한 적도 없는데도요.
♡ 05 유년 시절의 화이트데이
화이트데이만 되면요,
하다의 집 앞에는 하다에게 제일 먼저 고백하겠답시고
사탕 사 와서 하다를 기다리는 남학생들 더러 있었어요.
올해도 지치지 않고 서있는 고등학생 남자아이들 몇 지나쳐
여정 홀로 당당하게 대문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겠죠.
저 사람은 누구지, 당황한 남학생들을 향해 웃으며
대학생의 여정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하다는 사탕 싫어해요. 사전 조사가 부실하네요, 학생들."
마당을 들어서며 여정은 속으로 생각했죠.
'제일 먼저 고백한다고 제일 먼저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애 마음이 무슨 선착순인가, 유치하기는.'
정작 여정은 자는 하다를 깨운 뒤 그 누구보다 먼저
가장 일찍 화이트데이 초콜릿을 하다에게 선물했겠죠.
가장 유치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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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여담으로,
하다는 아침잠이 많아서 여정에게 학교 갈 때 깨워달라
부탁하곤 했는데요, 여정은 하다의 잠든 얼굴을 보면
너무 곤히 잘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우지 못하고
그대로 혼자 학교에 가버려 하다한테 솜주먹으로 많이 맞았다죠.
♡ 06
하다는요, 고등학교 때 1년 정도를, 그러니까 여정이
군의관으로 있는 동안에 뉴질랜드로 유학을 갔었는데요.
여정은 애초에 제대 날짜를
하다의 프롬 때 즈음으로 맞춰놓기 위해 철저히 계산했어요.
그리고 여정은 제대를 하자마자 지구 반바퀴를 날아갔죠.
"어이. 주여정이. 제대했는데 술 한 번 거하게 마셔야지."
"나 오늘 밤에 바로 출국해."
"어디 가냐? 히야. 역시 있는 집 자식은 다르다.
제대하자마자 여행을 다 가고."
"여행 아니고. 하다한테. 프롬 파티 파트너 해주러."
여정은 아마 하다의 있던 파트너도 쳐내겠죠.
여정은 하다가 연애는 하게 둬도 하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의
옆자리는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을 거예요.
하다의 프롬 파티 사진에 그 아이의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요.
그리고 하다의 친구들은 하다 옆의 남자를 보자마자
그가 하다가 그렇게 말하는 여정이라는 남자임을 알아봤겠죠.
" So. He's the one you've constantly talking about, yeah?"
그러니까 저 남자가 네가 맨날 말하는 그 남자 맞는 거지?
"Oh. You mean the one she never stops yapping about?"
그냥 말한다고 하면 안 되지. 지겹게 떠들어대는, 이라 해야지.
♡ 07
주여정의 대학병원 동기들, 선후배들, 간호사들.
표이준(하다 아버지)과 박상임(여정 어머니) 씨까지 모두
여정이 하다를 좋아하고 본인은 동생 동생하고 있지만
실은 그저 동생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걸 물론 알았겠죠.
하다 역시 여정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았을 거고요.
당사자들 제외 온 세상에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은
남매 놀이 하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겠죠.
"엄마는 알았죠. 왜 말 안 해줬어?"
"네가 바보니? 말을 해줘야 알게."
"아들 위로도 안 해줘?"
"위로 대신 결혼 선물로 정략결혼을 줄 수는 있는데, 줘?"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정리해요."
"그래, 그러면 그 정도의 마음인 거야."
"와, 엄마 맞아?"
"생각 바뀌면 말해. 엄마라서 해주겠다고 하는 거야. 알아?"
vol 1.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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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때문에 해외 출장을 다녀온 여정, 어머니 상임 씨한테
학회 때문에 해외 출장을 다녀온 여정, 어머니 상임 씨한테
하다 선물 사 온 것 보여주는데
"엄마 어때? 이거 하다한테 잘 어울릴 것 같지.
애가 장화 신고 싶다고 했던 것 같아서."
"딱 하다 거네. 근데, 아들."
"응?"
"너네는 언제 사귀고 언제 결혼까지 할 거니?
엄마 축의금 돌려받으려면 병원장 자리 있을 때 해야지."
"아유. 엄마도 참. 그 소리도 이제 입 아프겠어요."
"절대 안 하겠다는 소리는 안 하는 거, 그게 네 본심인 거야."
"우리 어머니 또 잔소리 시작이네."
"근데, 너 뭐 잊은 건 없어?"
"응? 뭐요?"
"엄마 선물은."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사 오는 선물 족족 촌스럽다,
하시지만. 여기 있죠."
"응. 이번에도 촌스럽네. 이따 집에 하다 오니?"
"저녁 같이 하자고 했어. 선물도 줄 겸."
"우리 며느리한테 선물 센스가 이렇게나 차이 난다고
네 험담 좀 해야겠다."
"아유, 엄마. 애 곤란해해요."
"하다가 정말 곤란해 한 적 있어?"
vol 2.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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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아들 집에 깜짝 방문한 상임 씨.
'이렇게 싹싹하고 귀여운, 이미 가족 같은 아이가
혼자 사는 아들 집에 깜짝 방문한 상임 씨.
냉장고부터 열어 가져온 반찬 정리해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에서 파자마 입은 하다가 나와
"어. 이모 오셨다. 이모 안녕하세요."하고 살갑게 인사해도
전혀 놀랍지 않은 그런 사이인 거겠죠.
상임의 옆을 자연스레 꿰차 반찬 하나씩 집어먹으며
"이모, 뭐야? 이거 너무 맛있어. 왜 오빠만 줘요? 나도 먹을래."
이렇게 말하면, 상임 씨는 속으로 생각할 거예요.
'이렇게 싹싹하고 귀여운, 이미 가족 같은 아이가
이대로 우리의 가족이 되어준다면 참 좋을 텐데.
여정이도 많이 따뜻할 텐데.'
생각에 잠긴 상임 씨에게 "왜요, 이모?" 하고 묻는
하다에게 상임 씨는 이렇게 답하겠죠.
"하다가 그냥 여기 살면서 같이 먹으면 되지."
♡ 08
대학 때부터 오랜 세월 여정을 봐온 동기들은 대부분
여정의 하다를 향한 마음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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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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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이 주병원에 있을 때 여정의 자리에는
여정이 주병원에 있을 때 여정의 자리에는
하다의 초중고 졸업 사진이 떡 하니 붙어있었는데요,
새로 들어오는 후배들은 이걸 보고
이 선배 외동이라 들었는데 뭐지? 하고
궁금해서 구경이라도 하고 있으면
이를 본 여정은 어허, 닳아요 닳아하면서 다가와서는
내 동생 되게 예쁘지, 하고 팔불출처럼 자랑했겠죠.
물론 동기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저놈 저거, 어휴, 하고 한숨 쉬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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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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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이 주병원에 나이 지긋한, 결혼시켜야 할 딸내미 있는 교수님들이
여정이 주병원에 나이 지긋한, 결혼시켜야 할 딸내미 있는 교수님들이
꽤 탐내는 사윗감인데도 선자리 한 번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서울차병원의 차교수 딸 좋아하고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래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저렇게 멀끔하게 잘생겼는데도 애인 없는 여정에게
"혹시 선배님 진짜로 아직도 싱글이세요? 왜요? 제 친구 소개해드릴까요?"
하면 곤란해하는 여정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옆에서 동기들이 신입의 입 막고
"아이고, 우리 신입이 지인짜 눈치가 없다." 하고 끌고 갔겠죠.
며칠 안 지나서 주병원에 놀러 온 하다의 손을 붙잡고
병원 주변을 산책하는 모습을 본 신입은, '엥, 여동생이 있으셨나?' 했다가
하다를 보는 여정의 눈빛을 보고, 깨달았겠죠.
"근데요, 선배님. 저 둘은 대체 무슨 사이예요?"
"그거는 말이다. ....... 우리도 지금 약, 그래. 10년째 미스터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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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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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동기들은 얼마나 속이 뒤집어질까요.
"어, 오늘 여정이 안 나오는 날인가 봐? 종일 안 보이네."
여정의 동기들은 얼마나 속이 뒤집어질까요.
대학교 막 들어와 신나게 놀아야 할 신입생이 중학생인
'동생 같은 애' 학부모 상담 대신 쫓아가는 것도 보고
군대 휴가도 '동생 같은 애' 수능날 응원 가야 한다고
그 날짜에 맞춰서 빼는 것도 보고 제대하자마자 그 아이의
프롬 파티를 위해 지구 반바퀴를 날아가는 것도 보고
그런데도 계속해서 '동생 같은 애'라 우기는 여정 때문에
골머리 꽤나 앓았을 거예요.
"어, 오늘 여정이 안 나오는 날인가 봐? 종일 안 보이네."
"아. 걔 늘 N월 N일에는 오프잖아. 이번에도 미리 빼놨더라."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 자식이 빠져가지고."
"그, 왜. 표이준 교수님 딸내미 생일일걸?"
"....... 미친놈 아니야?"
"말하기도 입 아프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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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4
"표이준 교수님 딸, 표하다 걔 나 좀 소개해주면 안 되냐?"
라는 동기의 말에 분노하는 여정.
여정의 이런 반응에서 포인트는요,
1. 정작 네 살이나 어린애를 평생토록 좋아한 건 본인이며
2. 애라고 부르며 하다는 연애 상대가 아님을 자기 암시 중이고
3. 자그마치 28살이나 먹은 하다를 8살처럼 과보호하며
4. 나이만 먹었지 애인 하다와 정말 사귀고 싶어 하는 것도 본인이고
5. 예민반응 중임을 본인 제외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에요.
애당초 저 질문을 한 동기는 여정이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길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한 질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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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이 쟤는 왜 정신을 못 차리냐."
"여정이 쟤는 왜 정신을 못 차리냐."
"하루이틀이야? 내버려 둬."
"안 돼. 나 쟤네 커플 엄청 응원해. 귀엽잖아."
"쟤네는 내기도 했대. 주여정 몇 살에 그 애랑 결혼할지."
"나는 35살에 10만 원 걸어놨어."
"난 32살에 걸어서 이미 망했어. 저거 진짜 어떡하지? 술 먹일까?"
"내가 해봤다, 이미."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술 취해서 하다한테 전화하더니 하다 수다만 한 시간 들어주던데."
"하......."
"더 골 때리는 게 뭔지 아냐? 하다가 걱정 돼서
취한 여정이 집에 왔다는 거야. 한밤 중에."
"그래서 그래서?"
"안고 잤단다."
"....... 잤다고? 진짜 sleep? 자기만 했다고?"
"어. 애를 인형처럼 안고 잤대."
"아니, 다 큰 성인 여자애들? 쟤는 둘째치고 하다도 진짜 대단하다."
"자주 그러는 것 같던데."
"어이. 야. 주여정 좀 잡아봐라. 저거 데려가서 뇌 PET 스캔 좀 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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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5
어린이 병동을 들른 여정은요, 동생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기들 머리를 아주 잘 묶어주겠죠. 그걸 본 간호사 분이 물었어요.
"주 쌤은 동생도 없고 애도 없는데 어쩜
아이들 머리를 그렇게 잘 묶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의 동기들이 여정의 대답을 가로채 대신 답했죠.
"쟤 동생 있어요."
"야, 그게 동생이냐? 난 내 여동생 그렇게 본 적 없다."
"동생은 아니지 확실히. 그 눈으로 보는데 동생이면 큰일 나지."
♡ 09
"오빠, 혹시 나를 좋아해?"
"응? 오빠는 하다 사랑하지. 왜, 오빠가 요즘 너무 하다를 안 놀아줬어?"
하다의 장난 같은 질문에 여정은 머릿속 많이 복잡했겠죠.
첫째, 하다를 설득해 접어놓았던 여정을 향한 하다의 마음을
하다가 다시 자각하게 된다면 그 힘들었던 거절을 어떻게 다시 해야 할지.
둘째, 그 거절 정말로 또 한 번 더 할 수 있을지 스스로가 의심되어서.
능글맞게 하는 대답 안에는 분명 고뇌가 있었겠죠.
♡ 10
병원 가기 싫어하는 하다의 정기검진 날,
여정은 학교에서 바로 하다를 잡아가려고 반쯤 장난으로
하다의 수업을 도강하다가 기억력이 과하게 좋으셨던
교양 교수님에 의해 들켜 쫓겨났겠죠.
이 일 이후로 여정은 졸업한 지 한참인데 학교에서 다시금 유명해졌어요.
'제네시스 타고 학생회장 표하다 데리러 오는 훤칠한 남자'로.
♡ 11
"오빠, 내 남친이 자꾸 오빠랑 내 사이를 의심해.
그러니까 내 오피스텔 열쇠 좀 돌려줄래?"
"오빠랑 헤어지고 싶으면 대화부터 해야지, 하다야."
"오빠가 자꾸 그렇게 장난치니까 더 의심을 하는 거잖아."
여정은 속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아마 그건 의심이 아닐 거라고.
같은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남자에게는 이 연심은 분명
숨겨지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숨길 생각도 없을 테고요.
여정이 솔직하게, 혹은 장난스레 "의심이 아닐걸?" 하면
"그렇지만 오빠랑 나는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확실히 의심이라기보다는, 부당 고발에 가까운 거지."
라고 하다는 대답 하겠죠. 여정은 또 상처를 입을 테고요.
♡ 12
하다는 여정의 차를 탈 때면 여정이 문을 열어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서 (여정이 만들어 놓은 하다의 나쁜 버릇 중 하나)
여정의 손에 짐이 실려있어도 자기가 문을 열지 않고
그가 짐을 다 실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죠.
여정은 기분 나쁘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그런 하다가
어이없고 웃기고 또 귀여울 거예요. 그래서 물었겠죠.
"하다야. 너 밖에서도 그래?"
트렁크에 짐 다 실은 후 조수석에 다가와 하다의 문을 열어주면서
그 아이의 머리 한 번 쓰다듬고 "
아니다. 밖에서도 꼭 그래야 돼." 하는 여정.
운전석으로 돌아가며 생각해 보니, 그냥 다른 남자의 차는
타지 않았으면 싶은데.
그러라고 차 사준 건데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지만
굳이 말로는 내뱉지 않겠죠.
야무지게 안전벨트를 매며 하다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나 조수석 타면 멀미해서 남의 차는 오빠 차 아니면 잘 안 타."
여정은 '남'이라는 말 때문에 이 대답이 딱 반쪽만 마음에 들었겠죠.
♡ 13
여정은 디올 VVIP 고객인데요,
구매 목록에 남성 것은 없고 전부 여성 상품만 있대요.
여정이 자주 가는 디올 매장의 여정 담당 응대 직원.
여정의 구매 목록을 전부 꿰고 있으니 이제는 주여정이라는
고객의 선물을 받는 그 여자의 취향 완벽히 파악하고 있겠죠.
대체 그 주인공이 누굴까 이제는 얼굴 그려보곤 하는 지경인데
아무리 손님과 조금 가까워졌다곤 해도 선물 받는 분이
누구인지, 무슨 사이인지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선물 받는 분 연령대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으로 얻은
20대 후반의 여성인 것만 겨우 안 채로 궁금증만 늘어가던 도중.
"ㅇㅇ 씨, ㅇㅇ 씨 손님인 것 같네. 고객님께서 명함 들고 오셨어."
응대하러 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를 보자마자
깨달았겠죠. 아, 이 여자가 주여정 고객의 그 여자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자신이 판 물건인데 알아보지 못할 리 없죠.
이 분의 취향은 자기 친구라도 된 것처럼
속속들이 알게 되어 버렸으니 말이에요.
"요전에 금발 여성 분이 오셨었는데, 고객님 지인 분이신 것
같더라고요. 너무 예쁘고 귀여우시던데요?"
"하하. 그쵸. 같이 왔어야 했는데. 그날 제가 좀 바빴어요.
애가 뭐 사갔어요? 빼고 다른 것들로 좀 보여주실래요?"
"여자친구 분한테 이거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떠세요?
제가 직접 뵈니까 이제 더 잘 알겠더라고요."
"어우. 안목이 늘 탁월하셔서. 그럼 그걸로 주세요."
계속 말하지 않으려다가, 마지막에. 정말 마지막에.
여정은 덧붙이겠죠.
"아, 근데."
"여자친구는 아니에요."
♡ 14
"하다에게 향수 선물을 자주 하는데, 반드시 하다의 향수와
레이어링 잘 어울리는 향으로 자신의 향수를 맞춰사는 여정"
하루는 여정과 하다, 양가 가족 모임 행사 전.
하다는 일찍 여정을 만났다가
마침 백화점에 갈 일이 있어 그와 동행했어요.
눈에 보이는 바이레도 매장에 들어갔고, 직원은 열심히 추천을 시작했죠.
그러다 둘의 향을 맡은 센스 좋은 직원은 이렇게 말했어요.
"두 분 엄청 향수를 좋아하는 커플이신가 봐요.
우드 이모탈과 모하비 고스트로 레이어링 하신 거 맞죠?
남자분이 모하비 고스트고 여자분이 우드 이모탈을 뿌리셨네요.
보통은 반대라서 너무 아는 척하고 싶었어요."
하다는 평소에 무거운 향을 좋아한다는 것 알고 있으니
여정은 늘 향수를 고를 때 하다가 좋아할 만한 것을 먼저 고르고
직원에게 "레이어링 향수로는 어떤 게 있어요?" 하고 물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했겠죠.
레이어링 조합으로 잘 어울리는 향수 두 개를 모두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 하나, 하다의 것 하나 이렇게 사는 습관이 있는 여정.
그리고 이 둘이 만날 때에만 그 레이어링 효과가 나타나겠죠.
이런 점에서 여정은 꽤나 컨트롤 프릭 같아요.
♡ 15
여정은 독신인 주제에 집에 수저, 컵, 접시가
2세트 아니라 3세트 늘 준비되어 있겠죠.
하나는 여정의 것, 하나는 손님의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표하다의 것.
주여정이 이사할 때마다 당연하게 사두는 쇼핑리스트는요.
하다가 입을 여성용 파자마, 하다 전용 노란색 칫솔,
하다가 안고 자야 되는 인형, 하다의 수저와 그릇, 그리고 컵.
밤에 불 완전히 끄면 못 자는 애인지라
애 키우는 집처럼 콘센트에 꽂는 수면등이 마지막.
♡ 16
어린 시절 하다는 어머니의 투병 기간 동안
상임 씨와 성학 씨의 환영을 받으며
으레 여정의 집에서 며칠씩 묵고는 했어요.
그리고 하다는 자신의 베개 커버가 세탁기 안으로
들어간 날이면 늘 여정의 팔을 베고 잤겠죠.
나 팔베개해 주라, 뭐 이런 말도 없이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여정의 옆에 쓱 다가와서는 책을 잡고 있던 여정의 팔 하나
옆으로 펼쳐서 그 위에 머리 대고 누워버렸을 거예요.
여정의 이불까지 다 뺏어버리면서. 웃으며 여정은 물었겠죠.
"뭐 해, 하다야?"
"팔베개."
"내가 해주는 거야?"
"응."
뭐 불만이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여정을 올려다보는 하다.
여정은 그런 하다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면
"왜 웃어. 나 팔베개해 주기 싫어?" 하며 일어나려는
하다를 끌어안아버렸을 거예요. 보고 있던 책은 치워버리고.
"들어올 땐 몰라도 나갈 땐 마음대로 못 나간답니다, 아가씨."
베개 커버가 다 말라도 하다는 여정이 직접 커버를
씌워 줄 때까지 절대 자기 손으로는 씌우지 않았겠죠.
여정은 하다가 자신의 팔을 베고 잠드는 게 좋아서
그래서 며칠 동안 건조대 위에서 나 끼워주세요, 하고
기다리고 있는 베개 커버를 모른 척 외면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한 번은 일주일이 지나버렸는데 여정은
이 발베개에 자신이 익숙해지면 어쩌나
그래서 이 팔베개를 잃는 게 두려워진다면
내 새벽은 앞으로 누가 책임지나 덜컥 무서워져
그날 아침 일찍 하다의 베개에 커버를 씌웠죠.
♡ 17 어린이날
28살 먹은 하다의 어린이날 선물 준비해 포장하고 있는
여정을 본 상임 씨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지켜보다가
어쩐지 자신의 아들이 불쌍하기도 해서.
복잡한 마음으로 말을 건넸겠죠.
"여정아."
"응, 엄마."
"하다가 몇 살이지?"
"아이, 엄마는. 하다 나보다 네 살 어리잖아. 그걸 잊었어?"
"그래서 몇 살?'
"하다가 그러니까, 어. 이제 스물여덟이지."
"근데 너 지금 뭐 하니."
"여정아. 네가 하다를 애 취급한다고 해서
하다가 진짜 애가 되는 건 아니야.
너 입장 잘 정리해서 어디에 설지 똑바로 고민해.
하다가 언제까지 네 여동생 해줄 것 같니?"
♡ 18
하다가 뉴질랜드로 유학 가 있는 동안 늘 컴퓨터 모니터
세계 시간을 '뉴질랜드 시간'으로 띄워뒀던 여정.
서울과 크라이스트처치는 3시간 시차밖에 나질 않아
사실 아무 때나 전화해도 큰 무리가 없을 텐데도
여정은 구태여 하다의 시간에 맞췄을 거예요.
주말이면 너무 늦잠자지 말라며 오전 열 시 즈음에
꼭 전화를 해서 하다를 깨웠겠죠. 이를 위해서
정작 본인은 주말인데도 아침 7시에 일어나야 했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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